굄돌 책 보러가기
"엄마는 너희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이 없다. 엄마 아빠가 가진 것, 모두 사회에 내놓고 떠
날 거야."
엄마 아빠를 믿지 말라는 얘기다. 가만히 앉아 엄마가 하는 얘기를 묵묵히 듣던 큰아이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한 마디 한다.
"그래도 저기 있는 저 블라우스와 이모가 사 주신 귀걸이는 저한테 주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큰아이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정도 철이 들었을 때이고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아는
아이는 정말로 엄마가 그렇게 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면서도 제 눈에 예뻐보이는 블라우스 하나
와 제 마음에 드는 귀걸이 하나는 주고 갔으면 좋겠다는 청을 한 것이다. 참 소박한 소망이다. 사실 줄
것도 없다. 하지만 내가 세상 떠날 때가 되면 작은 부스러기라도 남아있지 않겠는가. 그걸 모두 세상
에 나눠주고 싶다.
진석이는 고 3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수능이 바짝 앞으로 다가왔으니 공부를 좀 했으면 좋겠는데 천
하태평이어서 나를 애닯게 한다. 나야 진석이가 우리 집에 열심히 오고 진석이네 부모가 교육비만
꼬박꼬박 보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놀았더라도 10개월 남짓 바짝 열심히 하면 뭔가 서광이 비칠 것도 같은데 펑펑 놀고만 있으니 속이
터진다. 성과가 있고 없고를 떠나 열심히 노력이라도 해 보는 것과 그런 시도조차 해 보지 않은 건
천지차이 아니겠는가.
꿈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인지 진석이는 정규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늦은 밤까지 논
다. 보충학습이나 야간학습 같은 건 애시당초 관심이 없다. 걱정이 된 엄마가 책이라도 읽으라며 우
리 집에 보냈을 때 진석이에게 약속한 게 있다.
"너에게 공부를 시키지는 않겠다. 대신 책은 열심히 읽어라. 대학 진학은 못하더라도 무식하다고 남
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거리가 되면 안 되지 않겠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내는 전혀 아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이 깨이고 자
신의 상태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자진해서 무엇인가를 시도한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공부를 해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 진혁이에게도 이런 기대
가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히다 보니 제법이다.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의 책부터 읽히기 시작했는데 일단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오고 생각도 아주 기막히게 끌어 올리는 게 아닌가. 공부를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
기고 독서 후 프로그램을 시키기 시작했다. 책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아이가 글은 또 언제
써 봤겠는가. 진석이가 쓴 글은 모두 단문장이거나 쓸데없이 긴 문장 한 둘 뿐이었다. 어디서 끊어
야 하는지, 어떻게 문장을 이어가야 하는지를 모르니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도 꾸준히 하다 보니
한 줄이 100자가 되고 200자가 되었다. 8개월이 지난 지금은 700자 정도는 앉은 자리에서 거뜬히 쓴
다.
독서에 맛을 들이고 어느 정도 생각이 고였구나 싶을 때 넌즈시 대학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일생동안 뭘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냐. 네가 즐겁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아봐라."
반짝 고민하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난 다음 진석이가 이렇게 말했다.
"~~ 방향으로 공부하면 취업이 잘 되고 연봉도 높다던데 그쪽을 알아봐야겠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드디어 이 녀석이 무엇인가를 꿈꾸게 되었구나. 내가 더 신바람이 났다. 그
런데 진석이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딱 거기에서 멈췄다.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다. 제 입
으로 말한 학교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알아보지 않았고 진학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볼 의향도 없었다.
참 궁금했다. 도대체 이렇게 무기력하고 생각없이 사는 이유가 뭘까. 놀더라도 불안할 테고 아무 생
각 없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고민스럽기도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태평일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 이유를 이번에 알았다. 가족들을 통해서였다.
"엄마 아빠를 많이 믿어요. 이번에 아빠가 새로운 사업체를 하나 차렸는데 아이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아빠가 왜 이걸 차렸는지 아느냐. 다 너한테 물려주기 위해서다.'"
진석이는 아빠만 믿는 게 아니다. 엄마의 재력도 진석이를 이렇게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만든 요인이
다. 어디에 땅도 있고 어디에 건물도 있고.... 진석이는 가만히 있어도 이런 것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공부하지 않아도,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큰 재산이 돌아올 텐
데 악착같이 공부하거나 치열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 날 진석이 엄마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일렀다.
"진석이가 뭐가 되든 되어야 할 게 아니냐. 이렇게 빈둥빈둥 놀기만 하면 안 되지 않겠냐. 진석이에
게 통보해라. '계속 이렇게 생활하면 모든 지원을 끊고 엄마가 가진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
해라."
아빠에게도 코치했다.
"방학이니까 매일매일 진석이를 데리고 나가 일을 시키세요."
아빠가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지, 돈 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세상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체험하고 나면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죽을 둥 살 둥 돈 벌어 자식들 편히 먹여 살리고 푼푼히 뒷바라지 해 준 다음, 평생 쓰고도 남
을 재산을 물려준다면 횡재일까. 그런데 그걸 믿고 빈둥거리다가 그대로 어른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등 따숩고 배 부르면 나태해진다. 내 앞길 내가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공부
도 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이런저런 노력도 한다. 캥거루 같은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생을 부모
품속을 맴돌며 자력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이유가 있어야 공부도 하고 치열하게 생활한다. 바람 같은 돈과 자녀의
소중한 인생을 맞바꾸게 해서야 되겠는가. 돈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물려줄 때 물려주더라도 자녀들 앞에서는 재산 자랑도 하지 말고 무엇을 주겠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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